고전 책 읽기가 시간 낭비인 3가지 이유

고전이 불편한 당신에게

 고전 책을 읽는 건, 특히 원전을 그대로 읽는 건 시간낭비입니다. 바로 아래 세가지 이유 때문이죠.

첫째, 고전은 낡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전은 어렵습니다.
셋째, 단순히 오래된 좋은 책을 읽기보다, 자신만의 고전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고전이 중요하다고 많이들 이야기 한다. 여기저기서 꼭 읽어야할 고전 책 추천 리스트를 발표한다.  심지어는 <서울대 권장 고전 100선 읽기>류의 책도 나온다. 몇 년 전 <리딩으로 리드하라> 같은 책이 인기를 끈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교양있는 현대인이라면 고전 책 몇 십권 정도는 술술 썰을 풀 수 있어야 할 듯한 분위기다.

 유명하다는 고전 책을 한번 펼쳐보자. 한단락도 눈에 안들어온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가슴이 답답하다. 머리가 띵해진다. 눈이 감긴다. 졸려 온다. 제대로 한 페이지 넘기기도 어렵다. 왜 그럴까? 내가 모자라서인가? 아니다. 아래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1. 고전은 낡았다

 고전의 정의를 말 그대로 보면 ‘오래된 책’이다.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다 고전은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오래 된건 맞다. 때문에 생각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현대인에게는 너무 뻔하고 당연하게 보이는 구태의연한 내용도 수두룩 하다. 

 실제로 살펴 보자. <리딩으로 리드하라> 에서 1년차 고전 책 읽기에 추천하는 <고문진보 전집>의 첫 대목이다.

고문진보 언해

학문을 권하는 글
집을 부유하게 하려고 좋은 밭을 사려 마라. 책속에 본래부터 천종의 곡식이 있다.
편하게 기거하려고 높은 집 지으려 마라. 책속에 본래부터 황금으로 된 집이 있다네.
문밖에 나섬에 따르는 이 없다 한하지 말라. 책속에 수레와 말이 떨기처럼 많다네.
장가가려는 데 좋은 매파 없다 한하지 말라. 책 속에는 얼굴이 옥같이 예쁜 여인 있다네.
남아가 평소의 뜻을 펴고자 한다면, 육경을 부지런히 창 앞에서 읽어야 하리.

– 황견 <고문진보 전집>

 어떤가? 진부하지 않은가? 그저 책 열심히 읽으라고 권하는 내용일 뿐이다. 전혀 특별한 내용이 없다. 

 조금 극단적인 예일 수 있지만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어떨까?

요즘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300여년 전, 아직 물리학의 개념 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에 쓰여진 물리학의 고전인데도? 물리학의 개념을 혼자 완성해낸 기적적이고도 천재적인 책인데 왜 물리학자들 조차 읽지 않을까? 이미 현대 물리학의 모든 저서에 <프린키피아>의 핵심적인 내용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온 물리학 책을 읽어야 최신의 연구 결과와 동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독서광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고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지의 총체를 알고자 한다면 결코 고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으며, 또한 고전에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중략)…현대인에게 필요한 과거지의 총체라는 것은…현대의 지(知)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주류만을 선별하여 그것에 대한 최신 보고서를 읽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무의미하게 고전만을 고집하게 되면 현대의 지와 직접 관련된 주류를 간과할 우려가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최신 전문서적들이 과거의 지식을 망라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고전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이 과거에 축적된 모든 과학기술의 토대위에 있듯이, 각 분야의 인정받는 최신 서적들은 과거의 모든 유명 고전과 사상의 기초위에 쌓아 올려졌다. 이 때문에 고전보다 최신서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더 나은 통찰을 주는 경우가 많다. 각 분야의 최신 명저를 꾸준히 읽는 것이 고전만 고집하는 것 보다 나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현대 천체물리학은 만물의 생성, 우주의 운행 원리를 그 어떤 고전보다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진화심리학 역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작동 방식을 그 어떤 철학이나 사상보다 설득력있게 알려주고 있다.

 진화론의 경우도 다윈 이래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 현대의 진화학자들이 오히려 다윈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지식을 갖고 있다. 현대 우주학은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시절에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을 알아냈고 빅뱅을 넘어 평행우주론이라는 대범한 영역으로까지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물론 모든 고전이 낡은 것은 아니다. 위에 예로 든 고문진보의 핵심 내용은 여전히 중요하고, 프린키피아가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고전들이 현대의 최신서에 비하면 낡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2. 고전은 어렵다

 얼마나 어려운지 실제로 한번 읽어 볼까?  

아래는 서울대 권장 고전 100권 가운데 하나인 르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첫 대목이다.

양식(bon sens)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양식은 자신에게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는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조차도, 양식만큼은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 사람들이 모두 착각을 하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은, 올바로 판단하고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원래의 양식이라든가 이성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한 능력이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갖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견이 서로 분분한 것은, 어떤 사람이 타인보다 더 이성적이어서라기보다는 단지 우리가 서로 생각을 다른 쪽으로 이끌어가고, 동일한 사물을 고찰하고 있지 않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정신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잘 사용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범우사

 무슨 소리인지 알듯 모를 듯 하다. 조금 시간을 들여 정신 바짝 차리고 읽으면 혹시 이해 될까 싶었지만, 난 무리다. 

 이이의  <성학집요>도 읽어보자.

주자(朱子)가 말하였다. “하늘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萬物)의 형태와 기능을 변화시킬 때에는, 기(氣)를 가지고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그에 부여되는 것이니(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니, 기가 있으면 이가 그 중에 내재합니다. 위의 말은 음양의 조화와 생성이라는 말을 받았기 때문에 ‘기로써 형체를 이루므로 이 또한 그에 부여된다’한 것이지, 기가 있은 다음에 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에 얽매여 글의 뜻을 해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하늘이 명령을 내린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만물이 생겨날 때에는 저마다 부여된 이를 근본으로 하여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德)을 타고 나니 이른바 성(性)이다(건(健)은 양(陽)의 이(理)요 순(順)은 음(陰)의 이입니다. 오상의 덕이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오행(五行)의 이입니다).

– 이이 <성학집요>, 동서문화사

 <리딩으로 리드하라> 에서 무려 1년차에 추천하는 고전이다. 나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 없다. 기를 쓰고 몇 번 더 읽어봤지만 난 포기다. 모든 고전 책이 이 정도 극악 난이도는 아니지만 상당수 고전이 이런 식이다. 옛날식으로 씌여 있다. 현대인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석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구조나 단어 선택도 현대의 책과는 확연히 다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저작, 손자병법이나 군주론 같은 유명한 고전 책도 몇몇 인상적인 구절 외에는 두 번 읽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구태의연하거나 지나치게 난해한 내용들에 숨이 턱턱 막힌다. 

 또 하나 고전이 어려운 이유는 제대로된 번역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위에 예시로 든 문장들의  번역이 좀 더 매끄러웠다면 훨씬 읽기 편했을지 모른다. 숱하게 도전했던 고전 책 읽기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이게 최선의 번역이었을까,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세계 언어 중 기껏해야 1% 정도가 쓸까말까한 한국어를 쓰는 우리의 숙명이다. 어찌 보면 돈 안되는 번역을 하지 않는 출판계의 문제이기도 하고, 이를 지원하지 않는 정부의 문제일수도, 고전을 외면하는 독자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튼 여러 문제가 뒤얽힌 풀기어려운 숙제다. 빠른 시일 내에 쉽게 해결될 만한 문제가 아니니, 섣불리 고전 책 원전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때문에 고전을 읽더라도 꼭 원전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고전에는 여러 판본과 해설서가 있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잘 골라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을 생각해 본다면 꼭 원전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위스키도 스트레이트만 마셔야 한다는 법은 없다. 때로는 온더락으로 때로는 칵테일로도 혹은 폭탄주로도 마셔야 제맛이 아니겠는가. 원전이라도 엉성한 번역서 보다, 해설서지만 제대로 씌여진 좋은 책이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좋은 해설서를 통해 원전만 읽을 때보다 더 쉽고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고전의 지식을 현대적으로 잘 해석하여 먹기 좋게 만든 음식처럼 만든 책이 많이 있다. 다양한 고전의 해설서 들이 바로 그렇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 처럼, 현대의 지의 총체는 고전의 바탕위에 서 있다. 결국 뿌리는 고전이다. 해설서만 읽고 원전을 읽지 않았다고 고전의 지혜가 부족하다 할 수는 없다. 오히려 현대인의 소화기 구조에 알맞게 요리된 해설서가 낫다.

 읽히지도 않는 원전을 붙들고 시간 낭비 말자. 날 것을 너무 많이 먹다보면 탈이 난다. 영양가는 하나도 흡수하지 못한 채. 적당히 익혀진(현대적으로 해석된) 요리를 먹고 영양가를 잘 흡수하는 편이 백번 낫다. 실제로 고전 책 읽기 교육을 하는 곳에서도 원전을 그대로 읽기 보다 강의나 해설을 곁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전 책 읽기는 그 핵심을 뽑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원전 읽는다고 폼잡는 것이 중요한건 아니다.


3. 나만의 고전이 더 중요하다

 흔히들 말하는 고전 책 목록은 말 그대로 추천일 뿐, 목록안에 있는 모든 책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무게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고전을 다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자신만의 고전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공명되어 깊은 울림과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책. 그런 책이 자신만의 진짜 고전이다. 자신만의 고전 목록을 구축하는 것이야 말로 책 읽기의 가장 중요한 목표중 하나다. ‘지적 생활의 발견’에서 와타나베 쇼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만의 고전이 없다면 아무리 책을 광범하게, 그리고 많이 읽는다 해도 당신을 진정한 독서가로 여길 수는 없다”

– 와타나베 쇼이치 <지적 생활의 발견>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반드시 읽어야만 하고, 행복과 교양에 필수적인 도서목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각자 나름대로 만족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상당량의 책은 존재한다.

– 헤르만 헤세 <헤세의 문장론>

 떠들썩하게 발표하는 무슨무슨 권장 목록이니 필독서 100선이니 하는 것들에 절대적인 권위나 당위성 따위는 없다. 그저 참고만 하면 된다. 추천한다고 덥석 살 일이 아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직접 펼쳐보고 판단하는 편이 좋다. 목차, 머리말, 첫 장을 살펴보고 잘 읽히는지, 읽을만한 내용인지 판단해 보자. 누군가 추천해 주는 목록을 의지하지 말자. 자신이 직접 책을 고르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안목을 높이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렇게 점점 안목을 높여가며 자신만의 훌륭한 고전 목록을 만들어가는 기쁨을 누리자.


 본의 아니게 고전을 읽지 말라는 주장으로 들릴까 걱정된다. 고전은 인류의 유산이자 현대 문명의 기초다. 나는 고전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강박감에 사로잡혀 고전을 무리하게 읽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억지로 추천 고전 목록을 따라가느라 허덕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전을 우리 형편에 맞게 잘 해석한 좋은 해설서를 읽고,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불릴만한 명저를 읽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것이 오히려 진짜 고전 책 읽기가 아닐까?

 고전 책 읽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5 thoughts on “고전 책 읽기가 시간 낭비인 3가지 이유”

  1. 당대 최고의 지적 산물만이 고전으로 남고, 그러니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어려운 것을 만나면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쉬운 것을 찾겠다는 태도는 회피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다른 어려움을 만나도 늘 회피할 것입니다.

    또다른 어려움의 이유는 시간과 공간과 문화의 다름입니다. 수백년 전에 수만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신적 기반 하에서 쓰여진 책을, 번역만 잘 하면 잘 읽힐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in medias res, 거기에 자신을 두고서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고전 읽기에는 적절한 안내와 그에 따른 배움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서구의 역사, 특히 정신의 역사를 다 건너 뛰고 갑자기 데카르트를 읽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것이 당연합니다. 이해를 한다고 해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식일 뿐입니다. 저게 왜 천재적이라는 건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의 고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고전은 긴 세월 동안 가혹한 필터링을 거쳐 살아남은 책을 말합니다. 죽은 뒤 최소 60 년은 지나야 고전을 논하기 시작할 정도라고들 합니다. 고전이 될만 한 지금의 책을 찾는 일은 포기하는 것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좋은 방법입니다.

    포스팅한지 2년이 다 된 글에 왜 댓글이 달렸냐 궁금하시겠습니다만… 구글 검색 중에 놀라운 제목을 보고 클릭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무엇이 시간낭비일까를 말해보자면, 이지성 같은 자들의, 시크릿 류의 책들을 읽거나,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시간낭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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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도 블로그 관리를 워낙 띄엄띄엄 하다보니 이제야 댓글을 봤네요^^
      그런데 제 글의 의도를 약간 오해하신듯.
      고전을 읽지 말자는게 아닙니다.
      지나치게 고전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죠.

      그리고 현대의 고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씀에는 동의하지 않아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책은 충분히 고전의 반열에 들만 하죠.
      이런 현대의 명저는 오히려 이전 고전의 액기스가 농축되어 참고한 고전보다 더 나은 통찰을 보여줄 수 있다고 봅니다.
      위에 썼듯 다치바나 다카시도 그런 취지의 말을 했고요,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

      덧붙여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했죠. 그런 고전들을 훌쩍 뛰어넘는 현대의 좋은 책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세기까지는 100년에 1권 나올만한 천재적인 작품이 이제는 1년에도 수십권 이상 나오는 시대라고 봅니다.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인 것이죠.
      저작물의 양이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님과 저와 생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걸 인정합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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