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니체와 관련된 책이 유난히 많이 눈에 들어왔었다.
하지만 언젠가 잠시 펼쳐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난해함에 화들짝 놀라, 니체는 함부로 접근할 만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게다가 “신은 죽었다”라는 지나치다 싶게 단정적인 선언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은근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새해 첫 책으로 고른 ‘초인수업’. 일단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수업’이라고 하니 좀 더 쉽게 개념 정리를 해줄 듯한 느낌이랄까. 니체가 주창한 초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니체에 관한 책이라는 건 바로 알아보겠으나, 단순히 니체의 어록 모음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도 됐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책이다. ‘에리히 프롬 읽기’라는 해설서로 처음 접하고 무거운 철학을 쉽게 풀어낼 줄 아는 내공이 느껴져서 좋은 느낌을 갖고 있는 분이다. 저자를 믿고 흔쾌히 펼쳐 들었다.
저자는 니체의 중심 사상을 여러 저작을 인용하며 10가지 큰 주제로 풀었다. 그중 인상적인 몇 가지만 추려본다.
1.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을 경멸하라
‘인간은 짧게 그리고 험난하게 살더라도 자신의 힘,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력이 고양되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존재다’
니체의 인간관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오랫동안, 편안히 사는 것이 아니라 힘의 고양과 증대라는 것이다. 자신과 싸우면서 스스로를 극복하고 안일함을 추구하려는 성향과 투쟁하면서 자신에 대해서 승리하라고 한다.
이런 니체의 인간관에 따르자면,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지와 생명력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 힐링이 대세인 요즘엔 너무 가혹하게 들리기도 한다.
니체는 한껏 고양되고 충만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초인’이라 지칭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사물들을 변형시켜서 마침내 사물들은 그의 힘을 반영하게 되고 그의 완전성을 반영하게 된다’
이 구절에 스티브 잡스가 문득 떠올랐다. 애플이라는 브랜드와 아이폰이야말로 이 구절의 예시로 가장 적절해 보인다.
행복에 대한 정의도 패기 넘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대목은 외부 환경과 상관없이 내면의 평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스토아 철학과도 많이 닮아 있다.
2. 인생, 의미를 찾지 않을 때 의미있는 삶이 된다
아이들이 한창 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자체가 더 없는 행복이고 천국의 실현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놀이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놀이에 빠져있는 자체로 이미 완전한 것이다. 이렇게 아이처럼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사는 것, 매 순간 자체가 이미 충만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그 순간의 충일함을 즐기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아이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초인’과 더불의 니체의 유명한 사상인 ‘영원회귀’도 귀 기울일만하다. 영원회귀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영원히 돌아온다’라는 뜻인데, 지금 현재의 삶이 영원히 되풀이되더라도 이 삶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꽤나 부담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영원히 되풀이될 이 순간을 긍정하기 위해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이 그만큼 의미 있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찰나의 순간순간이 영원의 무게를 지닐 만큼 소중한 것이다. 마치 평행우주를 염두에 둔 듯한 니체의 통찰이 놀랍기만 하다.
3. 당신의 적을 경외하라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인 성욕, 소유욕, 지배욕 등을 악으로 단죄하고 막으려고만 한다고 비판한다. 그런 본능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이기 때문에 이를 막는 것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욕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시켜야지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런 욕망을 제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숭고한 사람으로 보기 보단, 자신의 욕망을 적절히 통제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으로 취급한다.
경쟁에 대해서도 이렇게 얘기한다.
‘투쟁과 경쟁은 불가피하고, 그것이 불가피한 이상 어떤 형태의 투쟁과 경쟁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4. 당신을 위한 신은 어디에도 없다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사랑하면서 죽었다. 예수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특정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이러한 삶의 모습이다. 진짜 예수를 따르는 신자라면 그런 그의 모습을 본받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는 믿음과 헌금을 강요하며, 다른 종교와 사상을 수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광신도 집단이 돼가고 있다.
한편 니체는 이런 원수까지 사랑하는 예수의 정신이 ‘허약하고 병적인 생리상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실적인 자극과 고통을 피해 내면의 평화로 도피’한 것으로 본다. 기독교 신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일면 수긍이 가는 해석이기도 하다. 니체는 종교의 불필요함을 이렇게 단언하며 이야기한다.
‘아직 유아기적인 수준의 정신 상태에 있었을 때 인류는 환상을 만들어 그것에 의존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종교가 늘어놓는 순진한 신화, 날조된 기적,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를 강조하는 교리에 현혹되지 말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한다.
‘앞으로의 철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현실 자체에 입각하는 것이어야 한다’
5. 신념은 삶을 짓누르는 짐이다.
신념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니체는 그릇된 신념의 폐해를 이렇게 경계한다.
‘독단적인 이념(혹은 신앙)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다’
자신들만 옳다 여기는 신념 때문에, 이념 간 종교 간 갈등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 피바람을 일으켰는가. 자신의 신념이 그릇된 것은 아닌지, 꼭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지 수시로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한다.
‘니체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만이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 능력을 믿는, 진정으로 강한 자라고 말한다’
6.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절정이다
죽음에 관한 생각 역시 평범하지 않다. 니체는 이상적인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더 이상 긍지를 갖고 살 수 없을 때 당당하게 죽는 것. 자발적으로 선택한 죽음, 자식들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명료한 의식을 갖고 기뻐하면서 적시에 이루어지는 죽음, 그리하여 떠나는 자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 작별을 고하는 것이 가능한 죽음, 또한 생전에 성취한 것과 원했던 것에 대한 진정한 평가와 삶에 대한 총결산이 가능한 죽음’
그리고 곧바로 스코트 니어링의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는 단락이 이어진다.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 생일을 앞두고 스스로 음식을 끊고 사랑하는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면서 당당한 죽음을 맞이한다. 스스로 선택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죽음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니체 사상의 전반을 살펴보니, 거침없이 강직하고, 다소 남성적이고 때론 지나치다 싶은 독설이 마루야마 겐지와도 많이 닮아있다. 마루야마 겐지가 니체의 책을 읽고 그 사상을 받아들인 건지, 아니면 깨달은 자의 당연한 귀결인지는 모르겠다.
힐링이 대세인 요즘 같은 시대에 니체의 철학은 불편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달달한 힐링만으로 버티기에는 삶이 녹록지 않다. 이렇게 비상식과 부조리가 판치는 시대에는 오히려 이런 강인하고 패기 넘치는 철학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4 thoughts on “니체 <초인수업>,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