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의 독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요즘 완전히 반해버린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에 대한 간단한 감상이다.

책을 사들고 집에 오자마자 앉은자리에서 다 읽고, 바로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의 에세이집 또 한 권과 소설을 샀다.

그만큼 강렬한 인상이었다.

이력도 특이하다. 23살에 역대 최연소로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수상작 ‘여름의 흐름’은 회사 업무 중에 눈치를 봐가면서 난생처음 써본 소설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특별히 문학에 뜻이 있어서가 아닌 먹고살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책 제목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도 느껴지지만 예리하고 직선적인 화법은 듣는 이를 내내 불편하게 한다. 날카롭게 아픈 독설이지만 구구절절 옳은 말인 데다가, 한 번씩 조심스레 생각만 해볼 뿐 감히 입밖에 꺼내지 못했던 얘기들도 거침없이 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를 버리라는 내용은 언뜻 패륜적이기 까지 하다.

부모를 버려라

“부모들의 무심함에는 그저 기가 찰 따름이다. 관찰력도 사고력도 없는, 거의 동물에 가까운 생물이 인간의 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판단력이라는 것을 약간이라도 갖고 있다면, 이런 잔혹한 세상에 자식을 내보내는 무자비한 짓을 저질렀겠는가.”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부모 자식 간의 어정쩡한 연대가 서로를 망칠 수 있으니, 자식이 성인이 되면 무조건 집을 떠나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성인으로서 스스로를 책임지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성인이 된 자식이 여전히 부모 밑에 있게 되면, 독립할 힘을 키우지 못해서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계속 부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경우도 늙어가면서 자식에게 의존하기만 한다면 결국 서로를 좀먹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는 부모와 자식은 서로 떠나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미련 없이 자신의 세계로 떠나가야 한다.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흐르는 시간이 언젠가는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단호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집을 떠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자립의 가장 기본 조건이다. 이를 갖추지 않고서는 어엿한 어른이, 아니 제구실을 하는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직장생활은 노예생활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스스로 노예이기를 자처한 것으로 폄하한다.

“… 출퇴근 전철 안에서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인생의 절정기는 학교 축제 때뿐이었음을 절감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자유를 스스로 내던졌기 때문이다.”

지하철 출퇴근길의 사람들 모습이 마치 좀비 같은 이유가 다 있다.    

그런 좀비 같은 생활을 버리고 하루빨리 독립하라고 채근한다. 

사람다워짐을 방해하는 종교

종교에 대해서도 봐주기는 없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 냈다. 인간의 나약함과 교활함에서 신이라는 환상이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종교의 정의를 내린 후에는 인간의 자립을 방해하는 종교의 해악이 이어진다.

“종교는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커다란 장벽 중 하나이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자립의 정신이 깎여 나간다.”

위대한 사상가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종교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썼다.

“칼뱅(종교개혁가)도 인간의 사악함을 강조했고, 인간은 최대한 자신의 자존심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그의 사상 체계의 중심에 놓았다… 인간 생활의 목적은 신의 영광을 위한 것… 자신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서만 자신의 삶을 종속시킬 각오를 하는 것(이 종교다)”

이렇게 자립의 정신이 깎여 나가면서 점점 나약해지고 종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외부의 어떤 것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굳건하게 서라고 거듭 강조한다.

“자신에게만 의지하는 삶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다. 아니, 생명이란 그렇게 해야만 충만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도전하라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다양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스스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조건이다. 발견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는 그것을 찾아낼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삶을 위한 삶인지 죽음을 위한 삶인지가 뚜렷하게 갈린다.”  

스스로를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지도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이든 직접 도전해 보면서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숨겨진 보물을 찾아야 한다.

“자신 속에 어떤 보물이 잠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신도 모른다. 그 보석이 하나뿐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몇 개가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평생을 들여 그 보석의 원석을 갈고닦을 수 있느냐에 삶의 진가가 있다. 그 외는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인생이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인생인가? 위 구절을 곱씹어보면서 자꾸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진다.

냉정한 마루야마 겐지지만 책 말미에는 그래도 위로 비슷한 한마디를 던져준다.

“나는 칠십 가까이 살면서 절체절명, 고립무원, 사면초가 등의 궁지에야말로 명실상부한 삶의 핵심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그 안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에야말로 진정한 삶의 감동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나마 희망적이지 않은가. 충분히 필사적이라면 어느 정도는 삶의 감동을 만들 수 있을 테니.

힐링은 이제 그만

군데군데 논리적인 허점이 있고, 지나치게 단정적이거나 성차별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손상되진 않는다. 책 전반에 흐르는 그의 생각을 한마디로 하면 “자립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모로부터, 회사로부터, 국가로부터, 종교로부터 벗어나 순전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자기 고유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 자신도 최고의 소설을 지향하며 오직 소설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각오로 살고 있듯이, 독자들도 자신만을 의지하는 패기 넘치는 삶을 살기로 각오하기를 촉구한다.

부드러운 힐링은 제자리에 앉아 있어도 가능하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독설은 엉덩이를 세차게 걷어찬다. 그냥 앉아 있을 수 없다. 실행하게 하는 힘이 있다. 나도 그동안 ‘좀 늦어도 괜찮아, 잘 될 거야.’라며 망설이기만 했던 행동을 실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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