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저자 유발 하라리가 정말 대단하다. 40대 초반에 이 정도의 방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지녔다는 것이 놀랍다. 전 세계적으로 유발 하라리 열풍이 불고 있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단한 책이다. 600 페이지가 넘어가는 꽤 두꺼운 책이지만, 웬만한 소설 못지않은 흥미진진함까지 있었다. 기존의 상식을 깨부수는 지적 통쾌함까지 갖춘 명저다. 벌써부터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이후, 다음 책이 궁금해 진다.

1. 문명의 진보=개인의 행복?
“과거엔 편지를 쓰고 주소를 적고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편함에 가져가는 데 몇 날 몇 주가 걸렸다. 답장을 받는 데는 며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이 걸렸다. 요즘 나는 이메일을 휘갈겨 쓰고 지구 반대편으로 전송한 다음 몇 분 후에 답장을 받을 수 있다.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진화적 성공과 개체의 고통 간의 이런 괴리는 우리가 농업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인류의 진보라고 생각되던 통념을 다시금 바라보게 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특히 인류를 풍요롭게 해주었다고 생각되던 ‘농업혁명’이 삶의 질을 오히려 떨어뜨렸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인구폭발과 ‘방자한 엘리트’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고, 영양불균형과 끔찍한 노동에 장시간 시달려야 했다. 많은 인구가 한곳에 몰려살다보니 전염병에도 취약했다.
특히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개개인의 행복이 얼마나 희생당해야 했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문명의 진보가 곧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2. 다수가 맞고 소수가 틀린 것?
“문화는 자신이 오로지 부자연스러운 것만 금지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없다. 가능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말로 부자연스러운 행동,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아예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금지할 필요가 없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능은 애를 낳는 것이라는 주장, 동성애는 부자연스럽다는 주장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다. 남성성과 여성성을 규정하는 법과 규범, 권리와 의무는 대부분 생물학적 실체보다 인간의 상상력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주장은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인권주의자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로 들릴 것이다. 사실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소수는 항상 다수의 억압에 시달려왔다. 하지만 이런 깨달은 사람들의 주장에 앞으로 더욱 힘이 실리면서 소수에 속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시대가 가까워지는 듯 하다.
3. 종교의 유효기간은?
“서구인들은 2천 년 동안 일신교의 세뇌를 받은 탓에 다신교를 무지하고 유치한 우상숭배로 보게 되었다. 이것은 부당한 고정관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신교의 신을 믿는 신자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수호신을 몹시 좋아한 나머지 다신교의 기본 통찰에서 멀어졌다. 그들은 자신의 신이 유일신이며, 그분이 우주의 최고 권력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분이 여전히 사심과 편견을 지닌 것으로 보았고, 우리가 그분과 거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일신교가 태어났다. 그 신도들은 병에서 회복되도록, 복권이 당첨되도록,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해달라고 우주의 최고 권력에게 간청했다.”
“기독교 신앙은 나자렛 예수가 그들이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확신시키려 했던 비전秘傳의 유대교 분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분파의 첫 리더 중 하나였던 타르수스의 바울은 만일 우주의 최고 권력이 관심과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수고롭게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화신하셔서 인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면 이것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이야기이므로, 예수에 대한 좋은 말씀 — 복음 — 을 전 세계로 전파할 필요가 있다고 추론했다.”
“사실 일신론은 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일신론과 이신론, 다신론, 애니미즘 유산이 하나의 신성한 우산 밑에 뒤섞여 있는 만화경이다. 보통 기독교인은 일신론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신론적 악마, 다신론적 성자, 애니미즘적 유령을 모두 믿는다. 종교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르고 심지어 상충하는 사상을 동시에 인정하는 행위와 각기 다른 원천에서 가져온 의례와 관례를 혼합하는 행위에 대한 명칭으로, ‘제설諸說 혼합주의’를 썼다. 실제로 제설혼합주의야말로 단 하나의 위대한 세계 종교일지 모른다.”
기독교에 대한 요약된 역사와 해석인데, 그 어떤 설명보다 쉽고 날카롭다. 사실상 기독교에 대한 유효기간 만료 판정을 내린 것이다.
4. 앞으로의 종교는?
“그(붓다)는 6년에 걸쳐 인간 번뇌의 핵심과 원인과 치유법에 대해 명상을 했고, 마침내 그 번뇌의 원인은 불운이나 사회적 불공정, 신의 변덕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번뇌는 사람의 마음이 행동하는 패턴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고타마는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일 즐거운 일이나 불쾌한 일을 경험했을 때 마음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다. 당신이 슬픔을 경험하되 그것이 사라지기를 원하는 집착을 품지 않는다면, 당신은 계속 슬픔을 느끼겠지만 그로부터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슬픔 속에 풍요로움이 있을 수 있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되 그것이 계속 유지되며 더 커지기를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계속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한 가지 법칙으로 요약했다. 번뇌는 집착에서 일어난다는 것,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도록 마음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불교에 대해서도 설명하는데, 기독교와 완전히 상반된 태도를 보이며 시종일관 따뜻한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불교적 명상이 인류의 고통을 치유할 하나의 해결책이 될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최근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기독교보다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앞으로 종교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 가늠해 볼 수도 있겠다.
5. 무지의 혁명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 지식이었던 이슬람, 기독교, 불교, 유교는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신들, 혹은 전능한 유일신, 혹은 과거의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가 있었고, 그것을 문자와 구전 전통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오늘날의 과학은 지식의 전통으로서는 독특하다.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집단적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이 그렇다.”
“바벨탑, 이카루스, 골렘 이야기를 비롯해 수많은 신화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모든 시도는 반드시 실망과 좌절을 부른다고 가르쳤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근대에 들어서였다. 근대 문화는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인정했다. 그런 무지의 인정이, 과학적 발견이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과 결합하자, 사람들은 결국 진정한 진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이 풀기 힘들었던 문제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하자, 인류는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얻고 적용함으로써 어떤 문제든 다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과학 혁명이 지식 혁명이 아닌 “무지의 혁명”이었다는 해석을 나는 이 책의 백미로 꼽는다. 과학은 계속해서 무지의 영역을 정복하며 꾸준히 전진할 것이다. “신의 뜻이다”라며 지레 겁먹고 물러설 일은 더이상 없다. 인류의 진보가 과학을 통해 크게 증대되었고, 앞으로도 인류의 전진에 과학이 최선봉에 설 것은 자명해 보인다.
6. 문명의 진보보다 개인의 행복
“흥미로운 결론 중 하나는,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까지만이며, 그 정도를 넘어서면 돈은 중요치 않다”
“무일푼의 병자라도 사랑하는 배우자, 헌신적 가족, 따스한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소외된 억만장자보다 행복감이 높다.”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인류의 역사를 한권에 담은 빅히스토리로 끝나지 않는다. 기나긴 역사의 흐름에서 인류 개개인의 행복에 따뜻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이 맘에 든다. 특히 앞서와 같이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불교적 관점과 ‘완전한 평정’이라는 스토아 철학의 개념을 제시한 것에는 동질감마저 느낀다.
7. 스스로 신이 된 인류, 사피엔스의 미래는?
“앞으로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기술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생리기능, 면역계, 수명뿐 아니라 지적, 정서적 능력까지 크게 변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유전공학이 천재 생쥐를 만들 수 있다면 천재 인간을 만들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일부일처제 밭쥐를 창조할 수 있다면 평생 배우자에게 충실하도록 유전적으로 타고난 인간을 왜 못 만들겠는가?”
“약간의 추가적 변화만 있으면, 제2차 인지혁명의 불이 붙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의식이 창조되고 호모 사피엔스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로 바뀔 수도 있다. 우리가 아직 이를 달성하기 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로 하여금 초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막는 극복할 수 없는 기술적 장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의 법칙을 바꿀 수 있는 또 다른 기술이 있다. 사이보그 공학이다. 사이보그는 생물과 무생물을 부분적으로 합친 존재로, 생체공학적 의수를 지닌 인간이 그런 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거의 모두가 생체공학적 존재다. 타고난 감각과 기능을 안경, 심장박동기, 의료보장구 그리고 컴퓨터와 휴대전화(우리의 뇌가 지고 있는 자료 저장 및 처리의 부담 일부를 맡아준다)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사이보그가 되려는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마지막으로 인류의 미래 전망을 내놓는데, 유전공학, 사이보그 공학 등을 통해 스스로를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얘기다. 유전공학으로 우리 몸에 생화학적 변화가 생기고, 사이보그 공학으로 물리적 변화까지 오랜 세월 누적된다고 생각해 보자. 인공지능을 뇌에 탑재하고 모든 장기가 인공장기인 인간이 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때의 인간을 우리는 정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기계인가? 의식이 인간과 동일한 수준의 로봇을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 문구는 인류 모두에게 경고성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스스로 진화의 키를 쥐고 있는 존재로써, 우주의 유일할지도 모를 지적 존재로써, 무한한 자부심과 책임을 느끼며 이 문명을 아름답게 지켜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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