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내 인생 최고의 책 #03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생명을 적게 표현하면 표현할수록, 당신은 그만큼 더 ‘소유’하게 되고, 당신의 생명은 그만큼 더 소외된다.”

-칼 마르크스

책의 첫머리에 인용한 칼 마르크스의 말이다. 사실 이 한마디에 이 책 <소유냐 존재냐>의 핵심이 축약되어 있다.

에리히 프롬 최고의 역작

이 책 <소유냐 존재냐>는 에리히 프롬의 마지막 역작으로,  ‘사랑의 기술’,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함께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이다.

이 책이 1976년에 나왔고 에리히 프롬이 1980년에 죽었으니 사실상 그의 평생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심리학, 사회학, 신학, 역사, 철학 등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다양한 방면에서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만큼이나 소중한 책으로, 몇 차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고전이다. 또한 삶의 방향을 소유가 아닌 존재로 전환할 수 있게 힘을 북돋우는 고마운 책이다.

소유 vs 존재

프롬이 말하는 소유와 존재란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우선 일상적인 경험들을 예로 들어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은 대화에서 소유와 존재의 차이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고수하려고 전전긍긍하느라 거리끼는 일이 없기 때문에 대화에 활기를 가지고 임한다.

지식에 있어서도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 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앎을 중시한다는 면에서 스토아 철학과도 많이 닮아있다.

신앙에서도 소유 양식으로 종교를 대하는 것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소유 양식에서의 신은 하나의 우상이 된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의미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한낱 사물이며, 인간은 그것에 자신의 힘을 투영함으로써 결국 스스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굴종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소외 형태에 빠진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소유 양식으로서의 신앙은 스스로는 모색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 확신을 원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절름발이 인간들을 위한 목발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자기 탐욕을 은폐하는 싸구려 구실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존재양식의 특성

그리고 존재양식의 특성을 내가 이해한 대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존재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능동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능동성이란 단순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내면의 만족을 충분히 느끼며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프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프롬은 스피노자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다음은 그중 존재양식을 잘 표현한 구절이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 본성의 전형’에 가까워지도록, 즉 최상으로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활동적인 인간이 되고자 애써야 한다.

새로운 인간

프롬은 존재양식을 받아들인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몇 가지 중요한 항목만 옮겨본다.

– 모든 형태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마음가짐을 가진다.

– 나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물도 나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 베풀고 나누어 가지는 데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누린다.

–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동하려고 노력한다.

– 운명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아득한 목표지점이 어디에 있든 간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왜냐하면 그렇게 의식하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삶은 그 자체로 충족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성취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새로운 사회

책의 마지막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제안으로 마무리되는데, 오늘날의 시각으로도 매우 대범하고 탁월한 식견이다. 어떤 부분은 마치 현재의 한국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건네는 조언 같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오늘날 사회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해악은 (개인에게) 연간 수입의 최소치를 보장해줌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게으르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실현 불가능하고 위험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진부한 확신에는 이렇다 할 사실적 근거가 없다. 그것은 단지 무력한 약자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합리화하는 표어에 불과한 것이다.)

이른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정보를 은폐하거나 변조하는 행태는 폐기되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필수 조건은 원자(로)의 무장해제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과 이야기들은 “존재”에 관한 것

위대한 종교들도 결국은 존재를 선택하라는 권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다.

붓다도 왕자로서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한 길을 선택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도 결국 존재 양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모든 감동적인 이야기들도 소유가 아닌 존재를 택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신화 속의 영웅들, 멋진 이야기의 주인공들 모두 소유보다 존재를 선택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불을 훔쳤다. “신들에게 복종하는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겠다.”라고 하며 용기 있게 존재하기로 선택한다.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도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한 주인공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마루야마 겐지의 ‘천년 동안에’ 역시 고여있는 자가 아닌 “흐르는 자”로 존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소유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프롬은 시종일관 존재를 선택하도록 촉구한다.

물론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이 완전한 무소유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완벽한 존재양식을 구현하는 자체가 불가능이니 다만 최대한의 존재양식을 지향할 뿐이다.

프롬은 존재양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삶을 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 개개인이 그리고 인류 전체가 이런 존재적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것이 새로운 인류 진화의 방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만 인류가 존속할 수 있다.  

책 마지막에 “교리도 제도도 없는 휴머니즘적 종교성으로의 개종을 이뤄내자”는 대목을 보면, 자신의 생각이 종교만큼의 무게를 갖기를 원했던 듯하다. 에리히 프롬의 이러한 종교적 휴머니즘에는 종교 이상의 숭고함이 서려있다.

마지막으로 책 말미의 루트 난다 안젠의 후기 중 일부를 인용한다. 존재양식으로 사는 개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표현했다.

개개인의 인격은 우주와의 연대감을 심화하고 상승시키는 한편, 궁극적으로 이 모든 유리된 가닥들을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묶고 스스로를 자아와 인류, 사회와 연결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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