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만 존재하는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남자

“ 인간사회의 영원한 꿈. 전쟁 없고, 배고픔 없고 두려움 없는 사회. 따스한 사랑과 즐거움이 그득한 사회. 이러한 사회, 이른바 완전사회를 바라는 건 한낱 허황된 꿈일까.
어찌 생각하면 꿈으로만 돌릴 게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의 온갖 사물은 날로 진보 발전하고 있나니, 사회기구와 사회 조직의 완전화도 바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된다고 본다.장래의 어느 날엔가 완전사회는 이룩되리라고 내다본다. 헛된 꿈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성 있는 예기(豫期)다. 그럼 그 꿈은 어느 때 어떤 경로를 거쳐 현실화하겠는가. 이의 대답이 소설 <완전사회>다.”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SF 소설  <완전사회>의 머리말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문윤성은 1916년 생입니다. 100년도 더 전에 태어난 분의 소설이라니 놀라울 뿐이죠. 더구나 미국, 유럽도 아닌 우리나라에 이런 소설가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돕니다.

소설은 일종의 타임캡슐에 인간을 넣어 미래로 보내는 국제연합의 프로젝트로 시작됩니다. 주인공은 한국인, 이름은 ‘우선구’라는 인물입니다. 주인공은 마치 오늘날의 냉동인간과 비슷한 상태로 깊은 잠에 빠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우선구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미래의 인간들이 그를 깨운 것이죠. 
하지만 깨어나 보니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낯선 세상에서 전 세계 유일한 남자인 주인공이 겪는 고난, 고뇌, 의외의 만남이 꽤 빠른 템포로 흥미진진하게 이어지죠.

특히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하게 되는 ‘여자만 있는 세상에 나 혼자 남자’라는 설정이, 뭔가 대단히 흥분되면서도 에로틱한 상황이 전개될거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주인공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미래 세상의 여성들은 남성에게 대단히 적대적입니다.

특히 충격적인 대목은 여성들이 남성에게 반기를 들고 아예 남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미래 인간들이 남성, 여성을 떠나 진정한 성(性)이라는 의미로 진성 선언을 이렇게 천명합니다.

<진성眞性 선언>
“성(性)의 모순과 대립이 있는 한 인류와 동물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불행의 씨는 여기에서 싹트고, 여기서 자라난 악은 한없이 반복되고 발전한다. 우리는 이제 그만 이러한 어둠 속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우리는 영원히 참되고 아름다운 사회와 역사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 걸쳐 남성의 존재를 부인하고 이를 제거한다.”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주의를 벗어나자는 페미니즘, 그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급진적 페미니즘, 혹은 여성우월주의, 이런 것들도 아득히 넘어서서 아예 남성을 제거하자는, 완전한 극단으로 치달은 미래가 도래한 겁니다.

뭔가 약간은 에로틱한 전개를 기대했던 저도 실망했지만, 우리의 불쌍한 주인공 ‘우선구’도 많이 당황합니다.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미래인간, 진성인들에게 주인공은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됩니다. 과거 세계의 생활상을 연구한다는 목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 체, 세계 이곳 저곳으로 끌려다니며 고생을 하죠.
여성들이 정복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남성이 여성들의 박해를 받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반세기전에 이런 파격적인 내용이라니 아주 놀랍습니다. 

소설 속의 여러 설정들도 아주 재밌습니다.
미래에 한글이 세계 공용 문자로 사용된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국가 개념은 없어지고 하나의 거대한 세계 정부가 들어섭니다. 
교통수단도 재밌는데, 사람들은 제트엔진을 등뒤에 매고 자유롭게 날아 다닙니다.
하나의 이동수단으로 잠수, 항해, 육로이동, 비행까지 모두 가능합니다.

현재 쓰고 있는 물건들도 등장하죠. 소설 속의 ‘단파 통화기’는 ‘무선으로 주고받는 음향 장치’라는 소설 속 설명을 볼 때, 현대의 휴대폰이라고 보면 될거 같습니다. 관람기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아이패드나 태블릿 비슷한 기기도 등장하죠. ‘움직이는 보도’는 요즘의 ‘무빙워크’를 연상하게 합니다. 

생활상도 재밌습니다. 사람들의 업무시간은 8시부터 정오까지 하루 4시간 입니다. 5살부터 9살까지는 교과서 없이 자유롭게 놀면서 공부하죠. 더 기발한 건 ‘홀랜’이라는 장치인데, 여성만 존재하는 세상에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기계가 등장합니다. 소설 속의 설명을 빌리자면 성행위를 돕는 기계인데 작동 방식의 묘사가 그리 에로틱 하진 않습니다.

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동안의 인류 역사도 흥미롭습니다.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3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강대국들이 서로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습니다. 전쟁을 관망하던 소국들이 양쪽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며 3차 세계대전이 끝나죠. 전세계 90%의 인구가 죽고 육지 대부분이 방사능에 오염됩니다.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 호주 일부만 겨우 살만한 땅으로 남게 되죠.

8년후에는 4차 대전이 발발합니다. 이때는 핵이 아닌 ‘기상작전’이라는 무기가 주로 사용됩니다. 적 진영에 초고기압, 초저기압 같은 이상 기후를 일으켜서 서로 공격하는 거죠. 
2년의 전쟁 끝에 세계인구는 9천만으로 줄어듭니다.

전쟁후에는 과학의 힘으로 인류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표아래 세계과학자연맹이 탄생합니다. 과학의 힘으로 전인류의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도래하죠. 요즘 일부 선진국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제도의 궁극적인 형태를 50년 전의 소설에서, 그것도 우리나라 소설가가 상상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여성뿐인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과학 발전으로 정자 없이 난자만으로 수정하고 인공자궁을 통해 출산이 가능해 집니다. 난자만으로 복제되기 때문에 여성만 태어나게 되죠. 이런 방식을 통해 태어난 사람들은 여성이 아닌 진성으로 불렸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만으로 구성된 국가가 출현합니다. 출산과 육아에 시달리지 않는 여성은 오히려 남성들보다 높은 경쟁력을 갖게 되고, 여성국가가 점점 강성해집니다.

기존 국가들과 여성국가들 간의 분쟁이 잦아지다가 결국 남녀간의 성 전쟁으로 5차대전이 발발하죠. 결말은 여성 국가의 승리. 겨우 살아 남은 남자들 8천명은 화성으로 쫓겨납니다.
그외 남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포로신세로 전락하고 서서히 멸종해 버리죠.

이렇게 성차별없는 여성만의 이상적인 세상이 도래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극단적인 페미니즘 소설이 아닌가 싶은데 그렇게 단순하게 결말이 나지 않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정부는 효율적이긴하지만 실상은 통제가 심한 전체주의에 가까운 사회가 되버리죠.
자유를 보장하지만 체제를 흔드는 일에는 잔인할 정도로 엄격합니다.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에서 예술은 검열당하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성행위도 국가가 공급한 기계로만 해야 합니다. 사람간의 직접적인 행위는 금지되고 위반하면 무기징역에 처해집니다. 본능은 무시되고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가 되죠. 
하지만 우리 주인공 ‘우선구’는 이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섭니다. 폭력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한 방식으로 저항합니다.

여기서 결말까지 다 얘기를 해버리면 소설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아무튼 탁월한 소설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태어난 분이 반세기전에 성 정체성, 페미니즘, 젠더 간 대결, 심지어 채식주의 까지 시대를 훌쩍 앞서간 생각을 소설화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합니다. 소설 전체를 흐르는 평화에 대한 갈망과 완전한 사회에 대한 작가의 기대 역시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줍니다.

독특하고 훌륭한 발상과 수준높은 철학이 결합된, 한국 SF 소설史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좋은 SF 소설은 해외에만 있다는 저의 편견을 깬 걸작입니다.
실제로 요즘 우리나라 SF 소설이 해외로 번역되어 나가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고 하네요. 
어쩌면 조만간 우리나라 SF 소설이 새로운 한류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인간 자  체의 혁명을 치러야겠다. 역사적 여건에 얽매여 지내온 인간을 지양하고 슬기로운 인간, 능동의 인간으로서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겠다.

동물적 인간을 부인하지 않는 한 모순과 대립은 영원히 존재한다. 지금 우리가 이웃을 돕는 건 단순히 이웃을 돕는다는 작은 뜻뿐만 아니라 우리가 동물의 세상을 벗어나 참된 인간 사회에 영주 하려는 자위권의 발동이다.”
– 문윤성 <완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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