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영상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예일대 철학과 교수인 셸리 케이건의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제 나름의 요약이었습니다. 죽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기에 전혀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더 소중한 삶에 충실하자… 라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 영상에 달린 많은 댓글들이 ‘그래도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전 죽음의 공포가 너무 자주 밀려와 심장이 뛰기도 합니다.. 고민해봐야 어쩔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상상하면 무섭고 아프고 두렵고 합니다….
저는 여전히 죽음이 두렵네요. 아무런 생각를 하지못한다는 것이 매우 두렵습니다…
죽음이 무섭고 싫은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이 아닐까…?
죽음도 무섭지만..우주가 소멸되어 세상이 끝난다는것이 더 무섭다..ㅠㅠ 삶에 정말 감사해야 할것 같아요 ㅠㅠㅠ 매일 무섭습니다..죽음이 두려워서..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그 누가 죽음 앞에서 무섭지 않고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저도 이 책을 감명깊게 읽긴 했지만, 마음 한켠엔 살짝 아쉬운 느낌이 남아 있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냉철한 이성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는 아무것도 없다는 다소 단정적인 결론이 매몰차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른 방식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방식은 바로 종교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죽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는 점이죠. 하지만 종교를 가진 분들은 사실 이 영상을 볼 이유가 없을겁니다. 이미 자신의 종교가 제시하는 해결책을 받아들이고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들 중에서도 종교와는 상관없는 관점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더 큰 전체와 연결하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방식은 ‘더 큰 전체와 연결하기’ 입니다. 말이 좀 어려운데요. 쉽게 말하면 ‘나’ 자신에게만 생각을 집중하는 대신에 더 큰 전체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내 육신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내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더 크게는 인류, 극단적으로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내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몰입의 즐거움’의 저자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영생을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행동은 오래도록 울려퍼지면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상에 영향을 미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개인 의식이 죽고 난 뒤 어딘가에 보존되든 아니면 깡그리 사라지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전체 현실을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남으리란 것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내 육체가 죽더라도 내 삶의 흔적은 영원히 남기때문에 더 큰 맥락에서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죠.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한 성원임을 자각하고, 우주가 베푸는 아름다운 광경과 기쁨을 누린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뒤를 이어 태어나는 사람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도 괴로워하지 않는다. 마음속 깊은 곳의 본능을 좇아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에 충분히 몸을 맡길 때, 우리는 가장 큰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된 개인이 아니라, 전체 인류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로 여긴다면 죽음을 괴롭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또 다른 책 <몰입의 재발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진화가 더 복합적인(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정신 에너지를 투자하는 만큼, 육체가 죽은 후에도 우리가 기여한 바는 계속 자라난다. 한때 우리의 일부였던 유전자와 밈에 담겨 있던 정보는 그후에도 미래를 형성해나갈 것이다. 우리 행동의 메아리가 시간의 복도 끝까지 울려퍼질 것이다.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재발견>
내가 지금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영향을 미치며 미래를 형성해 나간다는 겁니다.
내 육신, 내 자아에만 얽매이지 않고 더 큰 전체와 연결시키므로써 자신의 한계,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시도할 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전략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실제로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한다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았다고 표현하는게 맞겠죠.
2. 일원론, 내가 곧 세상이다.
우리는 세상과 나는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굳이 할 필요도 없죠. 너무 당연하니까요. 나는 당연히 세상과는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도 나와 상관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죠. 내가 당장 죽어 없어지더라도 세상은 아무 상관없이 돌아갈거니까요. 이런 생각을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걸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일원론입니다.
일원론은 세상과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내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 일원론을 아주 쉽게 설명한 책이 있습니다. 채사장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입니다.
채사장은 책의 핵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신비한 사상은 일원론이다. 자아와 세계라는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존재가 실제로는 하나이며,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이다
–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사실 일원론의 역사는 굉장히 깁니다. 서양에 ‘구약’이 있다면, 동양에는 ‘베다’가 있습니다. 서구 종교와 철학이 구약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베다’는 동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연히 불교와 유교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베다에서 가장 유명한 경전인 ‘우파니샤드’의 결론이 바로 일원론입니다.
네 밖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실체와, 네 안에 펼쳐진 자아의 본질은 궁극으로 하나다.
– <우파니샤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아주 허황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채사장같은 대중적인 작가가 완전히 허황된 얘기를 쓰진 않았겠죠. 일원론을 그저 과학을 모르던 옛 철학자들의 낡은 사고방식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채사장은 독자들의 이런 우려를 미리 예상하고 인류의 과학적 탐구 과정을 먼저 탐색합니다. 양자역학, 다중 우주론 등, 현대 물리학이 거둔 최신의 성과들은 일원론이 옳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이 결론을 딛고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참여 인간 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관찰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약한 인간 원리에서 참여 인간 원리로 나아가며, 우주의 존재 기반은 우주 자체에서 점차 그 안의 관찰자로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렵지만 쉽게 얘기하자면 우주는 나와 분리된 실체가 아니며 관찰하는 내가 있기에 우주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양자역학과 다중우주론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의 실험에 따르면 관찰자가 보느냐 안보느냐에 따라 파동으로 존재하던 물질이 입자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이론이 다중우주론이죠. 이런 최신의 과학과 일원론을 겹쳐 생각하면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생깁니다. 현대 물리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일원론으로 해석하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관찰자와 관찰대상, 나와 세상이 근본적으로 하나라면 여러 과학적 난제들이 해결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죠.
채사장은 이렇게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나의 세계와 나의 우주가 나의 의식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면, 당신의 세계와 당신의 우주가 당신의 의식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면, 우리는 세계 창조의 모든 이유와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합리적으로 선언할 수 있다
…
우주가 처음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은 오직 인간의 의식과 사유 때문이었다. 기억해야 한다. 텅 빈 우주를 지켜보고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외부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일원론은 평범한 인간의 직관으로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분명하고 확고한 현실의 이면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이런 비현실적인 측면을 인류의 현자들이 밝혀냈고, 그 정체가 바로 일원론인 것이죠.
채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여기서 말하는 용기란 내가 쥐고 있던 세계관을 내려놓을 용기를 말한다. 내가 믿는 진리가 거짓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 말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는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는 초월적인 신념을 가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로 일원론적인 신념을 키워나간다면 죽음을 초월한 세계에 한발짝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럼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게 됩니다. 일원론의 세계에서 죽음은 그저 육체를 벗어나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죠.
내 몸에 갇혀있는 분리되고 제한된 자아를 벗어나 더 큰 전체와 연결지어 생각하고, 더 나아가 이 세계와 내가 하나임을 알 때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