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있기에 더 소중한 삶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시나요?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기 꺼려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겠죠.
그래도 인생에 한번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죽음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훗날 자신의 죽음을 대할 때,
당황하지 않고 더 의연하게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더 중요한 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하면
삶에 대한 관점도 더 명확해 지기 때문입니다.
여기 죽음에 대한 훌륭한 조언을 해주는 책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입니다.
20년 넘게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는
셸리 케이건 교수의 죽음에 대한 강의를 책으로 낸것이죠.
이번 영상에서는 일부 책 내용을 인용하면서
제 나름의 감상과 느낌으로
이 책의 핵심을 전달해 드리고자 합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다.
어둠없는 빛이 있을 수 없듯이, 죽음 없는 삶도 없다.
죽음이 없다면 그건 삶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죽을 수 밖에 없고 그렇기에 삶이 있는 것이다.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옛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내 곁에 없고,
내가 죽는다면 내 자신이 존재하지 않기에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잘 곱씹어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프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잘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는데 슬플 수는 없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
스스로의 죽음 이후를 상상해 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죽음 이후는
그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스스로를 상상해 보자.
꿈도 없는 깊은 잠.
이때는 스스로의 존재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느낌, 의식이 없는 상태다.
죽음은 육체의 기능이 다한 이후
이렇게 깊은 잠에 빠진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 상상도 하기 싫다면?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오늘이 지나면 당연히 내일이 온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서 진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할수 있을까?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이 당연하듯이.
그래도 인정할 수 없다면?
이 우주 자체도 결국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라면 어떤가.
빅뱅으로 탄생한 이 우주도
언젠가는 소멸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길이는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 인간도 죽음의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일들로부터 더 이상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
실망할 필요도 없다.
다른 결과는 처음부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슬퍼할 이유가 사라져버린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필연성’을 이해하면, 우리는 죽음을 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숙명이 가혹한 형벌로만 여겨지는가?
오히려 반대로, 아무리 짧은 생이라도
삶 자체를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면 또 다른 문제일까?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일시적인 슬픔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이 존재했었고 함께 했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기쁨을 떠올리면
감정의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우주에는 수 많은 원자들이
그저 먼지처럼 떠다니고 있다.
그런데, 특별한 행운으로 인해
원자들이 적절한 방식으로 배열되어
내 육체로 뭉쳐지고, 그 속에 정신이 깃들어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빚어진 것이다.
이 거대한 우주라는 무대에서,
장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복잡하고 미묘한 우연과 필연이 겹쳐지며
‘나’라는 존재가 아주 잠시나마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음은 그저 잠시 삶을 가졌던 입자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이렇게 죽음을 직시하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자명해 진다.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의 가치는 훨씬 크게 다가온다.
기적처럼 주어진 삶의 순간들을 충분히 음미하며
충실히 사는 것이 제1의 목표가 되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짧더라도.
삶의 가치는 그 길이와는 전혀 상관없으므로.
너무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은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마지막 순간,
‘참 좋은 삶을 살았다’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을 수 있도록.
다음은 미국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가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낭송할 기도문에 쓴 한토막입니다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을 떠올릴 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흙들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
-커트 보네거트